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아 레오폴디네 (문단 편집) === 브라질 황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aria_Leopoldina_regent.jpg|width=100%]]}}} || || 남편 대신 [[섭정]]으로 각료회의에 참석한 마리아 레오폴디네, 1822년 || 1821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하고 브라간사 왕가는 [[포르투갈 왕국]]으로 돌아갔다. 포르투갈과 [[브라질]]에는 [[자유주의]]의 영향이 퍼져 사람들을 [[입헌군주제]]를 요구했으며, 브라질은 더이상 [[식민지]]로 남지 않고 포르투갈과의 [[연합왕국]]을 형성할 것을 요구했다. 페드루와 마리아 레오폴디네 또한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주앙 6세는 전제군주로 남고자 했고 사람들은 반발했다. 브라질인들은 포르투갈로부터의 독립을 희망하며 페드루가 브라질의 군주가 되길 바랬다. 페드루는 브라질로 향해 독립을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수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섭정직을 맡았다. 1822년 9월 2일, 각료회의에서 남편 페드루 대신 다른 중임들과 회의했다. 회의 결과 브라질의 독립을 지원하기로 결정되어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당시 [[상파울루]] 지방에 있던 페드루 왕자에게 전령을 보냈고, 이는 1822년 9월 7일 브라질 독립으로 이어졌다. 10월 17일에 브라질 제국이 선포되면서 페드루는 브라질의 페드루 1세로 즉위하고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브라질의 황후가 되었다. 브라질의 첫 황후이자 브라질에 애정을 가지고 독립을 지원한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브라질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마리아 레오폴디네의 인생은 황후가 된 후 불행으로 치닫게 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mpress Maria Leopoldina, by Luís Schlappriz.jpg|width=100%]]}}} || || 브라질의 황후 마리아 레오폴디네, 1822년 || 페드루 1세는 상파울루에서 한 하급장교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페드루 1세는 도미틸라 데 카스트로(Domitila de Castro)라는 이름의 이 여성을 정부로 삼고 리우데자네이루의 궁에 불렀다.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원치 않았지만 페드루 1세는 도미틸라를 황후의 [[시녀]]로 만들고 산토스 여후작 작위를 주었다. 페드루 1세는 도미틸라와의 애정을 과시하면서 점점 마리아 레오폴디네를 함부로 대했다. 페드루 1세와 도미틸라의 딸은 황녀들과 같은 교육을 받았다. 득의양양해진 도미틸라는 마리아 레오폴디네의 머리 꼭대기에 오르려 들었다.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도미틸라를 "매혹적인 괴물"이라고 칭했다. 페드루 1세는 자신의 정부에게 불만이 있는 마리아 레오폴디네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궁인들은 황후를 동정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녀로써 자부심이 강했던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이런 모욕을 참을 수 없어 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친정 가족들은 마리아 레오폴디네의 상황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 답장도 잘 하지 않았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1826년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 1826년 3월 10일, 주앙 6세가 사망하면서 페드루 1세는 포르투갈의 페드루 4세를,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포르투갈의 왕비를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즉위하고 약 2달 후 페드루 1세는 딸 마리아 2세에게 포르투갈의 왕위를 물려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